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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아멜리 노통브 장편소설

category 책/문학 2017. 1. 18. 14:27

▶ 공항에서 검색대를 지날 때마다 나는 짜증이 난다. (중략) 언젠가 나는 참다못해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정말로 내가 비행기를 폭파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괜한 짓이었다. 요원들이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유머감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중략)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좀 다르다. 내가 정말로 13시 30분발 비행기를 폭파시킬 계획이니까.

→ 5~6페이지 中


☆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전기와 가스상태를 점검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조일'이 소설가 '알리에노르'와 '아스트로라브'를 만나게 되면서 테러를 계획하게 된 심리적 과정을 담아낸 책이다. 조일은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에 대한 증오를 안고 태어난 듯한 인물이다. 부모님이 붙여준 이름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학창시절 자신의 눈에는 천재처럼 느껴졌던, 거대한 산과 같았던 이들의 몰락을 보고, 여신 같았던 여자아이의 흉해짐을 전해들으며 인간은 영웅의 탄생보다 몰락을 좋아한다는 것에 서서히 질려가며, 일상에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어린시절 학문을 미친듯이 탐독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차차 자신이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도 정신적으로 지쳐간다.


차곡차곡 그렇게 증오가 쌓여가던 조일은 우연히 에너지 문제로 찾아간 집에서 알리에노르란 소설가를 만나고 그 소설가를 돕는 동거인을 만나면서 그 증오의 상처가 씻겨질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 위기를 극복하면서 오히려 쌓여있던 증오가 발현되는 희열을 맛본다.


★ 참... 테러를 결심한 조일의 구구절절한 자기변명을 보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될 듯한 묘한 기분도 든다. 자신의 태어난 것, 이름, 주변환경,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운명이라 생각했던 여자에게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 답답함. 그러나 그런 것들이 테러행위에 명분을 부여해줄 순 없다. 그러나 감수성이 풍부하고 문하적, 예술적 분야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 변태 테러리스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 증오를 그렇게 푸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이 감수성 풍부한 분란종자가 말하는 어린시절 이야기를 살짝 훔쳐보자.


"그 후로 이십오 년이 흘렀고 이제 난 호머의 시를 단 한 구절도 암송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간직되어 있다. 나를 전율시켰던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전속력으로 회전하며 자연 전체를 총동원시키던 두뇌의 풍부한 능력이, 열다섯 살에는 지적 열정이 맹렬히 불타오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열정은 떠돌이 혜성 같아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21페이지 中)


풍부한 어휘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신세한탄 속에는 사람들이 어린시절 한 번 정도씩은 느꼈을 감정을 다시 한 번 끄집어 내어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변태가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을 먹고 신세한탄을 시작하면 비유, 은유, 의인화, 역설, 풍자를 웬만한 시인이 자지러질 정도로 맛깔나게 사용한다.


"알리에노르, 넌 한 그루 바오밥나무야. (중략)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런 나무 (중략) 인간에게는 신성한 존재가 필요하거든 (중략) 네 글이 매력적인 건 그 때문이라고." (110~111페이지 中)


증오에서 탄생한 풍부한 표현들을 듬뿍 느끼며 환각의 세상을 간접체험하기 딱 좋은 문학책. 겨울 여행. 이 작가의 작품을 읽은 것은 처음인데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 덧붙임 : 주인공의 분신이랄 수 있는 조엘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책표지에 작가 사진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출판사마다 겉표지에 대문짝만 한 작가의 얼굴을 경쟁적으로 박아 넣는 이런 시대에. 그런 사소한 점이 나를 더욱더 기쁘게 했다. 판매고를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될 말레즈 양의 매혹적인 얼굴을 내가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흐뭇함이 배가 되었다." (39~40페이지 中)


음... 그런데 겨울여행의 표지에는 분명히... 아니 이건 소설 속 인물을 형상화한 것인가? 아니면 표지마저 풍자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